치자꽃 설화
2023. 7. 24. 22:34ㆍ좋아 하는 시
치자꽃 설화
박규리
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네고
돌아서 돌 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
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
종각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
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
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
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
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
목탁 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
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
여자는 돌 계단 밑 치자꽃 아래
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
오늘따라 가랑지 엷게 듣는 소리와
짝을 찾는 쑥국새 울움소리 가득한 산길을
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
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
사랑하는 일이야말로
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
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
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
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
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
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
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는 여자가 되어
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
- 박규리 시인의 시집 “이 환장할 봄날에” 중에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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